제목 | 깨달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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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7/06/29 | 조회수 | 839 |
작성자 | 낙천원 | 주변에알리기 |
'깨달음의 유무(有無)에 따라 우리들은 부처일 수도, 중생 일수도 있다. 고타마 싯달타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깨달음은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이룰 수 있다는 게 바로 불교의 특징이다.
깨달음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일률적으로 대답하기 어렵다. 그것은 우리들 누구나가 자기의 독특한 얼굴을 가지고 있듯이, 깨달음도 주간적인 경험 안에서 발생하는 변화 이므로 그것을 말로 표현하다거나 객관화 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나 자신의 문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각하기만 한다면 그때는 모든 욕망에서, 성냄에서, 어리섞음에서 완전히 벗어나 더 이상 윤회의 사슬에 걸려들지 않고 대(大)자유인이 되는 것이라는 개념적인 설명밖에는 할 수 가 없다. 즉 깨달음은 논리적인 귀결이 아니라 체험적 각성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눈 뜬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한 우리는 눈을 감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시행착오와 잘못을 저지르고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바로 눈을 떠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눈을 뜰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시고, 자세히 일러 주셨다. 설탕이 달다고 아무리 설명하더라도 직접 먹어 보는 사람만이 그 단맛을 정확히 알 수 있듯이, 이론적인 설명보다도 체험이 중요시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신비하고 추상적인 내용이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살고 있는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해 주는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다. 따라서 미망에서 벗어나고 보면 '나(我)'는 결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호의존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다.
눈 뜬 사람이 코끼의 모양을 아무리 잘 설명해 주더라도 장님이 자기의 아집으로 잘못 이해 한다면, 코기리 모양을 알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아집이라는 무명(無明)이 장님의 눈 뜨는 일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명의 제거야말로 눈 뜨는 작업, 즉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 상식으로 만나는 불교(계환지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