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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물의 진상
등록일 2017/09/11 조회수 1025
작성자 낙천원 주변에알리기 트위터 페이스북

 끝없이 변하는 사람의 마음은 흐르는 강물이나 타는 촛불처럼 끊어지지 않으면, 뛰어다니는 원숭이처럼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지혜로운 자는 사물을 바로 보고 바로 들으므로 깨달음을 얻어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력을 떨쳐 버린다.

 이세상에는 아무도 성취할 수 없는일이 다섯가지 있는데, 첫째 몸이 늙는 것을 멈추게 하는 일, 둘째 병을 멈추게 하는 일, 셋째 죽음을 멈추게 하는 일, 넷째 소멸할 운명을 거절하는 일, 다섯째 심신이 소모한 것을 부인하는 일이다. 

 이 세상  평범한 사람들은 얼마 안가서 그 피치 못할 일에 부딪혀 필연적으로 고통을 받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그것이 피치 못할 일임을 알기 때문에 고통을 받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네 가지 진리가 있는데, 첫째 모든 생명은 무명에서 태어나고, 둘째 모든 욕망의 대상은 덧없고 불확실하고 괴로우며, 셋째 존재하는 모든 것 역시 덧없고 불확실하고 괴롭고, 넷째 세상에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내것' 도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덧없음이며 무아(無我)라고 하는 이 진리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시고  안오시는 일과 무관하며 획실하다. 부처님께서는 그 것을 아시고 모든 사람에게 법을 가르치신다.

 미혹(迷惑)도  깨달음도 마음 속에서 생겨나고, 모든 실세와 현상이 마치 마법사의 소매에서  여러 가지 물건이 나오듯이 마음의 작용으로 나온다.

  마음은 무한히 활동하면서 생활 환경을 조성한다. 불순한 마음은 불순한 환경을 조성한다. 그러므로 환경은 마음의 활동 범위보다 더 무한하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이, 마음이 사람의 환경을 창조한다. 부천미께서 창조하신 환경은 순수하고 깨끗하지만, 범상한 사람이 창조한 환경은 번뇌로 더러워져 있다.

  솜씨 좋은 화가가 다양한 세계를 그리듯이, 사람의 마음은 다양한 모양으로 나타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의 창조물이다.  부처님의 마음도 우리의 마음과 같으시며, 감각 있는 존재는 모두 부처님과 같다. 그러므로 마음과 부처님과 감각있는 존재들은 똑같이 모든 것을 창조하는 능력을 지녔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을 마음이 만든 대로 옳게 이해하시므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부처님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상황을 창조하는 마음은 추억과 공포와 비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것들이 무지와 탐욕에서 생기기 때문에 과거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에게 미혹이 생겨 마음속에서 여러가지 인연과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은 무지와 탐욕 때문이다.

  생사(生死)는  마음에서 생겨 그 안에서 사라진다. 그러므로 생사를 걱정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생사도 함께 없어진다.

  미망때문에 방황하는 마음에서 미개한 생명이 생긴다.  만일 우리가 미망의 세계가 우리 마음 안에 있음을 알면, 당황하는 마음이 깨끗해져서 불순한 상황을 만드는 일 멈추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는다.

 마음이 창조한 생사의 세계는 마음의 노예가 되어 그 지배를 받는다. 마음은 이렇게 상황을 지배하면서 세상에 고통을 가져온다. 마음은 이렇게 모든 것을 창조해서  조종하고 지배한다. 

  바퀴가 수레를 끄는 황소를 따라다니듯이, 고통은 불순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따라다닌다.

  착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행복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지만, 악한 마음으로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나는 잘못 했다'는 생각이 따라다니고 그 행동이 기억으로 쌓여 두고두고 고통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착한 동기에서 행동한 사람은 '나는 잘했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더 행복해진다.

  마음이 불순하면 발과 다리가 흔들려서 험한 길에서  고통을 겪지만, 마음이 순수하면 평탄한 길을 즐겁게 갈 수 있다.

  심신의 순결을 즐기는 사람은 자기 본위의 망념(忘念)과 불순한 생각과 사악한 욕망을 버리고 불성(佛性)으로 통하는 길을 걷는다. 마음이 안정한 사람은 평온을 얻고  밤낮으로 힘써서 마음을 더욱 고상하게 한다.

                                                                       <사물의 진상>

  이 세상의 모든것이 다 인연에 따라 생겼으므로 어느 것이나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없는데, 분명한 차별이 보이는 것은 사람의 어리석은 식별력 때문이다.

  높은 하늘에는 동쪽 서쪽의 구별이 없는데 사람이 마음대로 구별해 놓고 진상(眞相)으로 믿고 있다.

  하나부터 무한에 이르는 수는 각각 완벽한 수이고 양(量)의 구별이 없는데, 사람이 편리한 대로 구별해 놓고 다양한 양을 표시한다.

  생존과 파멸 사이에서 볼 때도 아무 구별이 없는데, 사람이 구별해 놓고 하나를 삶이라 하고 또 하나를 죽음이라고 한다. 사람의 행동에 옳고 그른 구별이 없는데 , 사람이 편리한 대로 구별해 놓았다.

  부처님께서 그런 구별을 무시하고 이 세상을 뜬 구름으로 보신다. 부처님께서는 유일한 것은 모두 환상에 불과하며, 사람이 집착하거나 내버리는 것을 모두 환상으로 보시므로, 외형의 유혹이나 사물간의 차이를 초월 하신다.

  사람은 스스로 가상의 이익과 안락 때문에 사물에 집착한다. 사람은 재산, 보물, 명예에 집착해 덧없는 현실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사람은 마음 내키는 대로 있음과 없음,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을 구별해 놓고 평생동안 끊임없이 집착하면서 고통을 받는다.

  예전에 먼 길 가는 사람이 강가를 걷게 되었을때 길이 험해서 강 건너 쪽을 바라보았더니 그 쪽은 훨씬 안전해 보였다. 그래서 나뭇가지와 갈대를 엮어서 뗏목을 만들어 타고 안전하게 건너가서는 '이렇게 쓸모있는 뗏목을 강가에 썩게 놔 둘게 아니라 가지고 가야겠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쓸데 없는 짐을 스스로 떠맡았다. 이 사람을  지혜롭다 할 수 있을까? 

  이 우화는 나쁜 짓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쓸데없게 되면 집착하지 말고 내버려야 함을 가르쳐 준다. 부처님께서는 평생소용없는 논쟁을 피하셨다.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며, 나타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으므로 누구나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다.

  부처님께서는, 사물의 존재는 시인할 것도 없으므로 나는(生)것도 없고 죽는(死)것도 없다고 가르치신다. 

  말하자면 연속하는 인연으로 만난 모든 것은 그 자체가 있지(존재하지) 않으므로 공(空)이라고  할 수 있고, 동시에 그것(空)은 인연과 상대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空)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환상의 근원은 사물의 형상에 집착하는 데 있다. 형상을 붙잡아 집착하지 않으면 어떤 망상도 어리섞은 미혹(迷惑)도 생기지 않는다. 깨달은 사람은 이 진리를 알기 때문에 그런 미혹에 빠지지 않는다.

  세상은 진정 꿈 같다. 세속의 재화는 사람을 유혹하는 신기루 이고,  그림속에 보이는 원근 처럼 현실성이 없는 아지랑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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