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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물의 진상
등록일 2017/09/14 조회수 1149
작성자 낙천원 주변에알리기 트위터 페이스북

  사물에도 본질적 특성이 없다고 하는 이 보편적 합일 사상을 공(空)이라 한다. 공은 실체가 없음을 뜻하는데 거기엔 생(生)도 없고 자체도 없고, 이원성(二元性)도 없다. 따라서 이 세상 모든 사물에는 생겼다가 죽었다고 할 만한 어떤 형상도 없고 특성도 없으므로 본성에 따라 구별할 대상도 없다. 그래서 삼라만상을 공(空)이라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삼라만상은 인연 때문에 생멸(生滅)한다. 모든 것이 서로 다른 것과 연(緣)을 맺고 있기 때문에 홀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빛이 있는 곳엔 반드시  그림자가 있고, 긴것이 있는 곳엔 짧은것이 있으며, 흰 것이 있는 곳에는 검은 것이 있듯이 무었이나 자성(自性)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어서 실체가 없다(無實體)고 한다.

  이와 같은 이치로 꺠달음도 무지를 떠나 홀로  있을 수가 없고, 무지는 깨달음을 떠나서 홀로 있을 수 없다. 삼라만상은 그 자체만의 본질에는 서로 다른 것이 없기 때문에 이원성이 없다.

  사람은 늘 자신이 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삶과 죽음이 다른 것이 아님을 깨달을 것이다.

  사람이 소유 개념에 집착하는것은 자아 의식을 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래 자아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소유할 것도 없다. 사람이 이런 진리를 깨달으면 불이(不二)의 진리를 깨달을 것이다.

  사람은 순결과 불결을 구별하려 하지만 어떤 행위에도 본질적으로 그런 구별이 없다. 그런데 옳지 못한 자들이 터무니 없는 생각으로 그런 구별을 한다.

  똑같은 생각으로 사람이 선과 악을 구별하지만 선과 악은 따로 있지 않다. 깨달음의 길을 가는 사람은 그런 이원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선을 칭찬하거나 악을 비난 하지 않으며, 선을 무시하거나 악을 용서 하지도 않는다.

  사람은 나면서 부터 불운을 두려워 하고  행운을 갈망한다. 그러나 그 구별을 잘 생각해보면 불운이 가끔은 행운이 되고, 행운이 불운이 된다. 지혜로운 자는 이렇게 변하는 상황을 합리적인 생각으로 맞아들여, 성공해도 우쭐거리지 않고 실패해도 낙담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불이(不二)의 진리를 깨달은 자이다. 

  그러므로  유와 무, 속정(俗情)과 진정(眞情), 순결과 불결, 선과 악 등 이원성의 관계를 사람들 마음대로 구별한 말 중에 사물의 본질을 옳게 인식하고 표현한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람이 그런 말의 뜻이나 그런 말에서 유래한 감정을 멀리하면 공(空)이라는 보편적 진리를 깨닫는다.

  마치 청순하고 향기로운 연꽃이  고원의 깨끗한 양토에서 가 아니라 낮은 늪 진흙에서 자라듯이, 불순한 속정에서 불성의 순수한 깨달음이 솟아난다. 심지어 이단자의 사견(邪見)이나 속물들의 미망(迷妄)이 불성(佛性)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9.18.

  잠수부가 진주를 얻으려면 바다 밑으로 내려가서 날카로운 산호초에 부딪히거나 광포한 상어의 습격 등 위험에 도전 해야 하듯이, 사람이 깨달음이라는 귀중한 진주를 얻으려면 속정(俗情)이라는 위험에 직면해야 한다. 그사람이 마음 속에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길을  찾으려는 소망이 생기려면 이기주의와 방종이라는, 산더미 같은 바위 사이를 헤매야 한다.

  옛날에 한 은자가 도를 구하려는 큰 뜻을 품고 도산(刀山)에 올라 화염속에 몸을 던지고 견뎌 냈다. 이처럼 도를 얻기 위해 위험을 무렵쓰기로 결심한 자는 방종의 도산과 증오의 불길 속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미풍을 맞아, 마침내 자신이 고생하면서  견뎌온 방종과 속정이 바로 깨달음 이었슴을 깨닫는다.

  부처님께서는 대립하는 두 견해를 구별하는 관념을  부정하시고 우리에게 불이(不二)의 진리를 가르치신다. 사람이 옳고 이롭다고 생각하는것을 추구하거나, 해롭고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을 버리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공허하고 덧없는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모든 것이 진실하고 영원하다고 단언 하는 것과 똑같이 잘못이다. 사람이 자아에 집착하면 불만과 고난을 풀어 줄 수 없기 때문에 잘못이고 , 자아를 완전히 부정하면 정도(正道)를 실천 할 수 없으므로 역시 잘못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괴롭다고 단언하는 것 역시 잘못이다,.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편견을 가진 생각을 초월하시어, 이원성이 단일성으로 융합하는 중도를 가르치신다. 

                                                                        부처님의 본성

                                                                          청정한 마음

 안간의 지능은 다양하고 천차 만별해서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착한 자와 심술궃은 자, 잘 따르는 자와 이끌어 주기 어려운 자,마음이 순결한 자와 불순한 자가 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는데 이런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은 마치 다양한 색조를 뛴 꽃들이 피었다. 하양, 연분홍, 파랑, 노랑,  등이 있는데 어떤 것은 물속에서 자라고 어떤 것은 수면에 잎을 펼치고, 어떤것은 수면 위로 잎을 들어 올린다. 인류는 그 보다 더 다양하다. 그 중에서 가장 뚜렷한 것이 성(性) 의 차이이지만 알맞는 방법으로 가르치면 남녀 구별 없이 모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므로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코끼리 조련사가 될 사람은 건강과 신뢰, 근면, 성실, 지혜 등 다섯 가지 자질을 갖춰야 하는데, 부처님의 숭고한 깨달음의 길을 따르는 자도 그런 특성을 지녀야 한다. 그런 자질을 가진 자는 성의 구별 없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깨달음에 대한 친화력을  지녓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랫 동안 받을 필요가 없다.

 닫는 도를 실천 하는자는 제 눈으로 부처님을 보고, 제 마음을 으로 부처님을 믿는다. 지금 부처님을 보는 눈과 부처님을 믿는 마음은 생사(生死)의 세계에서 헤매던 지난날의 눈과 마음과 똑같은 눈과 마음이다.

  어떤 왕이 산적들에게 시달리면 그 소굴을 찾아내야 쳐부술 수 있듯이 속정에 시달리는 자는 그 원인을 규명해야 한다.

  방안에 있는 사람이 눈을 떠면 우선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보고 나서 창밖을 내다 보게 마련 이므로, 우리는 방안에 있는 것을 인지하기 전에 밖에 있는 것을 먼저 인지할 수 없다.

  몸안에 마음이 있다면 마땅히 몸안에 있는 것부터 알아야 할 터인데 사람은 보통 몸밖에 있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몸안에 있는 것에는 거의 관심이 없어 아무것도 모른다.

  만일 마음이 몸밖에 있으면 몸에 필요한 것과 상관이 없을 텐데, 사실은 마음이 아는 것을 몸이 느끼고 , 몸이 느끼는 것을 마음이 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이 몸밖에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면 마음의 실체는 어디에 있을까?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을 속여 무지 속에서 헤매면서  멋대로 행동하게 만든 근본적으로 잘못된 두 가지 생각이 있다.

  첫째는 사람이 현세적 생사관의 근원이 된 판단력을 저희의 본성이라고 믿어온 것이고, 둘째는 자신의 판단력 뒤에 진정한  깨달음으로 인도한 순수한 마음이 숨어 있음을 모른 것이다.

  주먹을 쥐고 팔을 들면 두 눈이 그것을 보고 마음이 판단 하지만,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진심이 아니다.

  탐욕을 지닌 자아가 가상한 차이를 구별하는 마음에 불과한 판단력은 인연에 따른 것으로, 실질이 없는 공허한 것이며 끊임없이 변한다. 그러나 사람이 판단력을 진심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 미망(迷妄)이 인연이 되어 고통을 받는다.

  사람이 손을 펴면 마음이 그것을 알아차리는데 이때 손이 움직이나,마음이 움직이나, 아니면 아무것도 안 움직이나,? 손이 움직이면 마음이 따라 움직이고, 마음이 움직이면 손이 따라 움직이지만, 움직이는 마음은 공허하고  본질적으로  참된 마음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본질적으로 청순한 마음을 지녔지만 각자가 처한 주변 상황에서 생긴 속된 욕망 때문에 먼지와 부정물(不淨物)처럼 더러워진다.

이렇게 부정해진 심성은 그 사람의 본질적인 마음의 주인이 아니고, 집에 찾아든 불청객이나 침입자 같은 것이다.

  구름은 달을 자주 가리지만 달을 움직이지 못하고 그 순수성을 훼손하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부정해진 마음을 사람의 본성으로 착각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언제나 이 사실을 잊지 말고 계속 노력해서 변치 않는 순정을 일깨워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항상 변덕스럽고 부정한 마음에 사로잡히고, 빗나간 생각에 현혹해 망상의 세계에서 방황한다.

  불안하고 부정한 마음은 자신의 탐욕과 변덕스러운 주변 상황에서 생긴다.

  어떤 상황에서도 순수성과 평온을 유지하는 본성은 진정한 마음의 주제이다.

                                                                    

                                                                      부처님의 본질

  우리는 앞서 마음의 본질을 순수와 진실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부처의 본질이고 불성의 씨앗이다.

  햇볕 쬐는 곳에 뜸쑥을 놓고 볼록 렌즈로 햇볕을 가로막으면 뜸쑥이 타는데 어디에서 불이 생겼을까? 렌즈는 태양에서 엄청나게 먼 곳에 있지만 분명히 뜸 쑥을 태웠다. 그러나 뜸쑥에 타는 성질이 없었더라면 불이 생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지혜의 빛이 사람의 마음에  집중하면, 그 마음의 특질인 불성이 불타서 그 빛으로 사람의 마음을 밝혀 부처님 믿는 마음을 일깨운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지혜의 렌즈를 들고 믿음을 촉진하신다.

 사람은 제 진심을 부처님의 밝은 지혜에 조화 시키려 하지 않고, 세속적 탐욕의 함정에 빠져 선과 악을 악착같이 구별하면서  제가 만든 굴레를 쓰고 괴로워 하며 슬퍼한다.

  본질적으로 순수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왜 아직도 환상에 사로 잡혀, 부처님의 지혜의 빛인 제 불성을 덮어 두고, 스스로 미망과 고통의 세계에 뛰어들어 방황할까?

  옛날에 거울의 뒷면을 들여다 보고 얼굴과 머리가 안보이자 미쳐 버렸다. 사람이 경솔하게 거울의 뒷면을보고 미치니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깨달을 수 있는 때와 곳에서 깨닫지 못하고  계속 괴롭게 사는 사람은 이런 미치광이와 다를 것이 없다. 깨달은 사람은 쓸데없이 헤매지 않지만, 못 깨달은 자는 오랫동안 누적된 탐욕과  망상에 사로 잡혀 터무니 없이 잘못된 판단력으로 진심을 감춰 놓고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

 누적된 미신이 사라지면 깨달음이 나타날 터인데, 이상하게도  사람이 깨달음을 얻으면 미신이 없이는 깨달음이 없음을 깨닫는다.

  불성에는 종말이 없어서 사악한 인간이 ㅍ내세에 축생으로 태어나거나, 나찰로 태어나거나,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불성은 잃지 않는다.

  불성에 대한 인간의 친화성은 부정한 육신에 묻히거나, 세속적 욕망 속에 숨거나, 마음이 잊어도 결코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다.

  옛날에 한 사람이 만취해서 깊은잠에 빠졌는데, 옆에서 마냥 지키고 있던 벗이 더 버티고 있을  수가 없어 그 곁을 떠나면서 가난한 벗이 잠을 깨면 요긴하게 쓰라고 옷 속에 보석을 숨겨 두었다. 한참 만에 잠에서 깬 취객은 벗의 시혜를 모르고 빈곤과 기아에 허덕였다.  그 뒤 두 사람이 오래간만에 만났을때, 벗이 취객에게 보석 얘기를 하면서 잘 찾아보라고 했다.

  사람은 이 이야기 속의 취객처럼 자신의 내면 세계에 숨어 있는 탐(探), 진(嗔), 치(癡)라는 번뇌의 옷깃에 숨은 티없이 순수하고 한 없이 고귀한 불성을 의 식하지 못하고, 이승의 생사  문제로 고민하면서 헤매고 있다. 

  사람이 비록 제 마음 속 깊이, 더헐 수 없이 고귀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을 모르고 타락해도, 부처님께서는 그 중에서 극소수라도 잠재 의식속에 지극히 선한 불성을 지닌자가 있는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결코 신뢰를 잃지 않으신다.

9.21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무지해서 잘 속고 제 마음속에 있는 불성을 못 보는 자에게 믿음을 일깨워 주시고, 환상은 없애 주시며, 저희와 불성 사이에는 원래 아무 차이가 없음을 가르쳐 주신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불성에 도달하신 분이시고, 중생은 불성에 도달할 수 있는 자들이다. 이것이 양자간의 차이점의 전부이다.

  만일 어떤 이가 이미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 기만이다. 비록 자신이 깨달으려고 애썻지만 아직 부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성은 근면하고 충실한 노력 없이는 나타나지 않고, 불성에 도달하기 전에는 그 노력이 끝나지 않는다.

  옛날에 어떤 임금이 맹인을 모아 놓고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었더니. 송곳니를 만져 본 본 맹인이 제일 먼저 나서서 코끼리는 큰 당근 같다고 했다. 다음에는 귀를 만진 맹인은 큰 부채 같다고 하고, 몸통을 만져본 앉은뱅이 절구통 같다고 하고, 다리를 만져본 맹인은 밧줄 같다고 해 아무도 임금에게 코끼리의 참모습을 말해 주지 못했다.

  이와 같이 누구든지 사람의 특성을 부분적으로 표현 할 수 는있어도 불성을 지닌 인간의 본성을 완전하게 표현하지는 못한다.

  사람의 영원한 본질인 불성을 현세적(現世的)욕망이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고 죽어도 파멸하지 않게 하는 길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숭고한 가르침을 깨닫는 것밖에 없다.

   무아

  불성이란 말로 표현될 수 있으며, 다른 가르침(종ㅇ교)에서 말하는 '영혼'과도 비슷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자아'라는 개념은 사람의 판단력이 가상해 놓고서 꼭잡고 놓치지 못하는 허깨비이므로 버려야 한다. 이와 반대로 불성은 드러내기는 해야 겠는데, 무었이라도 표현할 수 없는 개념이다. '자아'와 비슷한 점이 있지만 '나는' 또는 '내 것'이라는 인식을 뜻하는 '자아'와는 따르다.

  자아가 있다고 믿는 것은 부재(不在)가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온 미신이다. 불성을 부정하는 것은  존재를 부재(不在)라고 가정하는 곳이기 때문에 잘못이다.    

  한 어머니가 앓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약을 주면서 아이가 약을 다삭이기 전에는 젖을 주지 말라고 했다. 

  어머니는 젖꼭지에 쓴 물을 발라 아기가 스스로 젖을 안먹게 하고 있다가 약을 다 삭였을 무렵에 젖꼭지를 씻고 젖을 먹였다. 어머니는 아이를 구하려는 지극한 모정 때문에 이런 방법을 쓴 것이다.

  이 우화 속의 어머니처럼, 부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미신을  몰아내고 자아에 대한 잡착을 떨쳐 버리기이해 자아를 부정하시고, 그것들이 사라지면 불성인 참마음의 실체를 설명하신다.

  자아에 집착하는 자는 미망에 빠지지만, 불성을 믿는 자는 깨달음을 얻는다.

  옛날에 어느 여인이 상속 받은 금고속에 금덩이가 들어 있는 것을모르고, 어떤 사람이 그것을 열어 줄때까지 가난하게 살았다. 부처님은 ㅇ;ㅣ여인처럼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을 열어 그 속에 있는 순수한 불성을 보여 주신다.

  이처럼 모든 사람에게 불성이 있다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서로 속이고 죽이며, 빈부와 귀천의 차이는 그렇게 많은 걸까?

  씨름꾼 하나가 늘 이마에 보석을 붙이고 살다가, 한 번은 씨름을 하는 중에 그 보석이 눌려서 이맛살에 박혀 안 보이자, 잃어버린줄 알고 상처가나 치려하려고 외과 의사를 찾아갔다. 상처를 들여다본 의사가 이맛살에 박혀 피와 먼지가 묻은 보석을 보자 반사경으로 비추어 씨름꾼에게 버여 주었다.

  불성도 이 얘기속의 보석과 같이 다른 관심 때문에 흙먼지 속에 묻히면 잃어버린 줄 알지만 좋은 스승이 그것을 되찾아준다.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불심은, 아무리 심한 탐욕과 어리석음과 노여움 속에 덮이고 아무리 잘못된 행동과 잔인한 보복심에 묻혀도 잃어 버리거나 무너지지 않으며,마음속의 온갖 부정이 없어지면 조만간에 되살아 난다.

  제 살과 피에 가려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보석을 반사경으로 본 씨름꾼처럼, 사람은 세속적 소망과 욕정(欲情)밑에 묻힌 불성을 부처님의 빛을 통해서 본다. 사람의 생활 환경과 형편이 어떻게 변하든지 불성은 항상 순결하고 평온하다. 마치 암소의 털빛이 붉든 희든 검든 상관 없이 그 젖은 항상 희듯이, 도 사람의 행동이 인생을 어떻게 조절해서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전혀 상관 없이 불성은 항상 순결하고  평온하다.

  인도 히말라야 산맥의 우거진 풀속에 숨어 있던 신비로운 약풀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고도 못 찾았는데, 마침내 한 현인이 그 방향을 맡고 있는 곳을 알아내 캐서 통에 넣어 깊은 산속에 있는 샘물에 넣어 두고 죽었다. 그 뒤  물이 쉬고 독성이 생겨서 흐르는 곳마다 맛이 달랐다.

  불성도 야생초 같은 속정에 묻혀서 안 보이는 것을, 부처님께서 찾아내 사람에게 보여 주는데, 사람마다 기능이 달라서 제각기 다르게 받아 들인다.

  금강석은 온갖 물질 중에서 가장 단단해서 부술 수 없다. 모래나 돌은 부수면 가루가 되지만 금강석은 흠도 안 생긴다. 불성은 금강석 같아서 깨지지 않는다.

  인성은 몸도 마음도 쇠잔하지만 불성은 파멸하지 않는다.

  불성은 참으로 탁월한  인간의 특성이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본질에는 남성과 여성처럼 영원한 부동성이 있지만, 타고난 불성에는 다른 것이 전혀 없다고 가르쳤다.

  슨금은 원광을 녹여 불순물을 제거해서 얻는다. 사람도 마음의  원광을 녹여 번뇌와 이기심의 불순물을 없애버리면 순금같이 순수한 불성을 되찾을 것이다.

   번뇌

  마음의 때 

   순수한 불성은 더럽히거나 덮어 버리는 속정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사람의 판단을 혼란케 하는 분석과 토론을 좋아하는 이성이고, 둘째는 사람의 가치관을  호난하게 하는 감정이다.

  사람은 잘못된 논리와 무도한 행동이 인간성을 더럽힌다. 고 생각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무명과 욕망이라는 두가지 추한 모습이 있다.

  잘못된 논리는 무명에서 나오고, 무도한 행동은 욕망에서 나오는데, 이 두가지가 하나로 어울려서 모든 불행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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