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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왜 불교는 깨침 해탈 열반을 주장하는가.
등록일 2017/11/16 조회수 863
작성자 낙천원 주변에알리기 트위터 페이스북
 
     불교는 현실 세계를 '고통' '괴로움'으로 본다. 그래서 그 괴로움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괴로움으로부터의 탈출, 곧 깨침을 말한다.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최선의 방법이다.
   '인생은 괴로움이다.' 하고 보는 것이 불교가 보는 현실세계이다.  불교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해탈을 주장하는 종교라고  하니까. 현실도피의 염세주의자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를 잘알지 못하고 하는 소리이다. 해탈이나 깨침은 현실 고통으로부터의 도피행이 아니라, 괴로운 고통과 정면으로 부딪혀 싸우는 투쟁이다. 괴로움의 본질인 괴로움의 아성에 도전하여 괴로움을 해결 하고자 하는 것이다. 괴로움이 싫다고 피해서 깨침이나 해탈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괴로움에 도전해 목숨을 다 바쳐 투쟁해서 얻어 승리의 세계가 깨침이 세계이다. 목숨을 다 바쳐도 얻을까 말까 하는 세계를 어떻게 피하고 도피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세상은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고, 행복과 즐거움도 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고, 춤추고 노래 부르고, 얼마나 재미있는 게 많으냐'  하며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불교가 그것을 부정하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이 거꾸로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매일 같이 우리들이 참고 견디면 인생의 주름살이 쭈글쭈글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무었 때문인가. 앞에서 열거한 그 행복을 얻기 위함이 아니던가. 그런레 현실에서 돌아와 보면 그렇게 노력하며 봉사했는데도 몸은 점점 늙고 두레는 삭막하고 무언가 불안하고 허무감에 뒤싸이는 것은 무었 때문인가. 이것은 나만이 아니다.  온 인류가, 지금만이 아니라 몇만 년, 몇십만년 전부터 이 행복을  충족하기 위해서 성인이다. 신이다. 과학이다. 문화이다. 하면서 얼마나 노력해 왔는가. 그런데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생활은 윤택해지나, 정신은 만족을 모른 채 반항과 증오 불안으로 치닫는다. 이러한  현실에 직면에서 문제의 근원으로부터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불교의 기본자세이다.

  불교는, 그 괴로움의 고통과 맞대결해서 싸우라. 그것을 쳐부수고  깨어서 승리하라. 그 승리의 순간은 깨침의 순간이 되고, 깨침을 통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 하며,  해탈에 이르러서 고요적적한 평화의 세계인 '열반에 든다' 라고 한다.

  '열반에 든다.' 라고 하고 '벗어난 세계'라고 하니까 죽음을 상징하고 안락한 죽음을 찬탄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를  되풀이 하는 것을 윤회라 하고,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하고,  그 윤회로 부터 해방되어 영원한 즐거움의 세계에 머무는 것을 열반이라 말한다.
  현실 삶에서 순간적 즐거움에 도취하는 것은 있으나,  결국 윤회하며 고통을 받는 괴로운 세계이므로, 불교는 이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어 열반의 세계에 들어갈 것을 요구한다.

   부처님께서 이를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모든 것을 이긴 자요, 일체를 아는사람.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롭고
      모든 굴레를 벗어났네.
      스스로 욕망을 파괴하여 자유를 얻었고
      위없는 지혜를 성취하였거늘, 누구를 스승으로 삼으랴.
      나에게는 스승이 없고
      천상에서나 지상에서나 견줄자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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