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천원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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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변화의 바람과 제2결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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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7/11/28 | 조회수 | 824 |
작성자 | 낙천원 | 주변에알리기 |
부처님 직제자들이 가르침을 폈던 시기의 불교를 원시불교라고 하는데 부처님 열반후 약 100년 동안에 해당한다. 부처님제세시에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교단이 형성되었지만 부처님 열반 후에는 부처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에 의해 교단이 운영되었다. 당시 교단의 범위는 서인도의 해안과 그 둘레의 지방을 뺀 북인도의 갠지스강 중류지역으로 이곳에서 부처님은 위대한 인격자로서 존경과 흠모속에 '인간 붓다'로서의 귀의의 대상이었다.
원시불교를 좀더 세밀히 나누어서 '근본 불교'와 '원시불교' 나누는데, 근본불교는 석존 입멸후 30년 동안을 말하는 것으로 이때에는 부처님 직제자들이 교단 전체를 운영하였을 것이고 석존의 가르침이 그대로 실천 되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교단의 이런 분위기는 3대 정도 까지는 그대로 수용되었는데 100년 정도 지나 부처님의 직제자들이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사회전반부에 자유주의 풍토가 가세하자 불교도 변화의 조짐을 보인다. 결국 교단은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 변화를 근본분열(根本分裂) 혹은 지말분열(枝末分裂찢을열) 라고 한다.
야사라는 비구가 바이살리를 여행할때 길거리에서 밧지족 출신의 비구들이 물이 든 항아리를 앞에 두고 신도들에게 금전을 보시할 것을 권유하는 것을 보았다. 이는 신도들로부터 직접 금전을 받지 못하게 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야사는 신도들에게 금전을 보시하는 것은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니 금전을 보시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이 때문에 밧지족 출신의 비구들과 야사 사이에 계율에 대한 언쟁이 벌어 졌다.
야사가 교단의 장로들에게 이의 판정을 구함으로써 급기야 교단차원의 문제로 확대 되었다. 결국 700명의 장로들이 모여 법의 융통성을 요구하는 바이살리 비구들의 10가지 계율에 대해 심사를 하게 되었으며 결과는 바이살리 비구들이 요구한 편법은 계율에 위배되는 것으로 판정이 났다.
이에 반발한 바이살리의 비구들은 자기들끼리 따로 모임을 갖고 10가지 편법을 계율에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판정을 내렸다.이때 비사리 비구들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한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결국 따로 교단을 만들었고 이를 대중부라 불렀다. 야사와 그 동조자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은 보수적인 성향의 장로들로 이들이 중심이 된 교단은 상좌부라 부른다.
보수적인 상좌부와 진보적인 대중부로 교단을 분열케 한 다툼의 원인인 십사(十事)라고 불리는10가지 편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① 소금을 다 먹지 않고 남겨 비축하는 것은 계율에 어긋나는가, 허용해야 하는가.(승려는 재산을 모을 수 없다는 계율 때문에)
② 정오를 넘으면 식사를 할 수 없지만, 태양의 그늘이 손가락 두 마디만큼 지난 시각까지 식사 시간을 연장하는 것은 계율에 어긋나는가, 허용해야 하는가.
③ 탁발을 통해 식사를 한 후 또 다시 마을에 들어가 다른 음식을 대접 받는 것은 어긋나는 일인가, 허용해야 하는가.
④ 가까이 있는 스님들이 모여 계를 지킴을 확인해야 하지만, 모이기가 번거로우면 각자 있는곳에서의 포살을 인정하는 것은 어긋나는 일인가, 허용해야 하는가.
⑤ 참석한 성원만으로 먼저 결정한 다음에, 나중에 온 비구에게 사후 승낙을 구하는 것은 어긋나는가, 허용해야 하는가 .
⑥ 스님들이 관행적으로 해온 행동을 실행하는 것은 어긋 나는가, 허용해야 하는가.
⑦ 우유를 마시고 또다시 마시는 것은 어긋 나는가, 허용해야 하는가.
⑧ 발효가 덜 되어 아직 술의 상태가 되지않은 음료를 마시는 것은 인정해 달라.
⑨ 이전에 쓰던 방석의 천을 사용하지 않고 새 방석을 만드는 것을 인정해 달라.
⑩ 물을 넣은 항아리 속에 금전을 넣게 하거나, 금이나 은을 신자로 부터 받는 일은 인정해달라.
이상의 10가지를 주장한 바사리의 비구들은 파계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계율 운영의 묘를 살리는 방향으로 약간의 융통성을 발휘하자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 주장의 타당성을 판별하기 위해 비사리에 모인 700명의 장로들은 비사리 비구들로부터 보수적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런 것을 인정하면 다른 계율들로 확산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700명의 장로들이 모여 계율에 대한 10가지 편법을 잘못된 것이라고 판결하고 계율의 정통성을 내세운 것을 제2결집이라고 한다. 석존사후 100년 뒤쯤의 일이다.
북방 불교에서는 아라한의 능력에 대한 의견차이 즉 오사(五事)를 근본분열의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