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천원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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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아쇼카왕과 제3차 결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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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7/11/30 | 조회수 | 1079 |
작성자 | 낙천원 | 주변에알리기 |
제2결집 이후 백여년 동안 별다른 큰 변화는 없었다. 석존 열반후 페르시아가 인도를 점령하고 이어 기원전 4세기경에는 서쪽에서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의 남쪽까지 정복한 후 바빌론으로 돌아가 곧 죽고 만다. 찬드라 굽타는 알렉산더의 잔존 세력을 물리치고 인도 역사상 처음으로 강대한 통일국가인 마우리야 왕조를건설했다. 이 왕조의 제3대에 아쇼카왕이 즉위 한다. 젊은 시절의 아쇼카는 굉장히 포악하고 호적적인 군주로서, 탐욕과 흉폭한 정복으로 살인마 아쇼카라고 불릴 정도였다.
칼링가국을 정복했을때에는 15만 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고 10만명 이상의 군대나 주민이 죽었다. 이 전쟁의 직접원인으로 그보다 몇배의 사람들이 죽었다. 이를 목격한 왕은 전쟁의 참혹함을 뉘우치고 불교에 귀의해 참회하며, '참된 정복과 정치란 무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르마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고 선언 했다.
만인이 마음으로 부터 귀의할 수 있는 정복이 다르마에 의한 정복임을 선언하며, 아쇼카왕이 불교에 귀의함에 따라 불교에 대변화가 온다. 아쇼카왕이 불교에 귀의하자 자기로 인해 목숨을 잃은 영혼을 들에 게 참회하고, 부처님의 발잧취를 더듬어 순례하며 부처님이 성도한 땅에는 보리수를 심어서 공양했다. 또한, 인도 각지에 8만4천의 보탑을 세워 불사리를 나누어 안치하고 칙명을 내려 석벽이나 동굴에 불타의 가르침을 새기고 석주를 세워 후대를 위해 남겨 놓았다.
석존의 가르침에 따라 왕은 통치이념을 '만민평등' 과 '생명존중' 으로 하고, 사냥과 지나친 형벌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려 인격을 존중하고 못 생명을 자비로 대하도록 했다. 그리고 스스로 5년에 한 번씩 전국을 순회하면서 법이 어덯게 실천되고 있나 확인했다. 국내는 물론 국외로 전도사를 파견하여 불교를 전파했는데 이 전도사들의 발걸음은 서쪽 멀리 그리스, 이집트, 시리아, 마케도니아로부터 북쪽은 간다라, 남쪽은 스리랑카에 이르렀다. 스리랑카에는 아들과 딸을 직접 보내 포교하였고 이런 영향으로 현재까지스리랑카는 전국민이 불교신자이다.
아쇼카왕에 의해 파견된 전도사들은 석존의 가르침을 지구촌 곳곳에 널리 전파하며, 전 인류에게 중생의 은혜를 알고 은혜에 보답하는 정신과, 생먕 존중, 자비연민의 사상을 설하며 정법이 널리 실천되기를 도모했다. 이 노력에 힘입어 불교의 기본사상은 서양철학과 서양문화에 영향을 미치며, 기독교 신약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쇼카왕은 자선 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의료시설은 물론 빈민 고아의 구제나, 수리시설등 국민 복지에도 힘을 쏟았다. 이런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다.
제3결집은 아쇼카왕이 다스리던 시기에 행해젔다. 결집의 원인은, 왕이 불법을 지극 정성 외하하자 외도들의 세력이 쇠약해지느느것은 당연 했다. 그러자 외도들이 불교의 비구 행세를 하며 불교사원에 들어와 혼란을 일으키는 일이 자주 발생 했다. 이에 왕이 직접나서 외도를 구별하며 추방하기도 했으나 근본적으로 불법과 외도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불법을 정리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6만 명의 비구가운데 우수한 비구 1천명을 선출해 파탈리푸트라의 대계원사에서 겨으, 율,론 삼장의 결집을 행했다. 1000명이 9개월 동안 완성했기 때문에 이것을 일천진법 이라고도 하고, 지명을 따서 파탈리푸트라 결집이라고도 한다. 불멸 후 236년에 일어난 일이다.
아쇼카왕의 귀의와 신앙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불교는 인도의 몇몇 지역에서 소수의 수행자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이 남아 이어져 세계종교로 확고히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아쇼카왕의 업적이었다. 지금도 아쇼카왕에 의해 건립된 불교 유물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아쇼카왕은 불교에서 없어서 안 될 위대한 다르마의 수호자이며 중흥조며 전도사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