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천원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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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부파불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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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7/11/30 | 조회수 | 848 |
작성자 | 낙천원 | 주변에알리기 |
기원전 2세기 교단이 상좌부와 대중부 둘로 나누어졌다가 대중부와 상좌부에서 각각 또 분열이 이루어져 20부파 혹은 30부파가 되었다. 이것이 부파불교이다. 각 부파에 남아있는 문헌을 통해 율전에는 율의 조항과 내용해석에 존재하며, 동시에 교리에도 차이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부파분열의 원인으로서 교리상의 해석 차이가 우선적으로 거론 될 수 있겠지만, 사실상 승가의 생할 형태의 변화나 현실에 대응하는 율 해석의 차이가 분열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각 부파는 개별적인 승가를 조직하면서 독자적인 성전을 갖게 된다.
부파불교시대의 각 부파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법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에 착수하였는데, 이것을 아비달마교학 이라한다. 그것은 법에 대한 연구라는 뜻이다. 아비달마 승려들은 경전을 분석하고, 종합함으로써 체계를 갖추어 갔다. 분석적 방법이란 경전의 가르침 중 중요한 것을 선택하여 하나하나 그 의미를 상세히 주석하고 해설하는 것이다. 종합적 방법이란 경에 수룩되어 있는 갖가지 교설을 정리, 안배하는 것을 말한다. 아비달마의 승려들은 왕실과 부유한 상인들로 부터 후원을 받아 경제적 불안과 사회적 의무로부터 해방돼 있었기 때문에 승원 깊숙히 박혀서 은둔적인 수행과 학문 연구에만 전념 하였다. 이 결과 2500여년 이상이나 지난 지금의 과학, 철학, 심리학, 경제학 등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며 심오한 불경을 현대인들은 만날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부파불교 시대에 경장, 율장 이외 논장을 갖추게 된다. 이것이 경 율 논 삼장의 탄생이다. 삼장의 완성은 부파불교시대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래서 부파불교를 아비달마(논장)불교라고도 한다. 남방상좌부가 전하는 『 팔리7논』과 한역본이 전하는『 발지(發智), 육족론(六足論)』이 대표적이다.
아비달마 승려들은 수행에 있어 출가자와 재가자를 철저히 구분하며 계율에 엄격 했다. 그래서 일반 대중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인적인 선정 수행과 교리에 대한 철학적 분석적 탐구에 더 몰두 했는데 그 결과 그들은 지나치게 형식적이 되었으며 또한 사소한 문제에 관한 집착된 논의는 불교의 청신함과 발랄한 생기를 잃게 하는요인이 되기도 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기설법(對機說法)에 의해 설해진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계화하고 이를 조직화 하여 장대한 사상적 건축물을 세운 것은 확실히 아비달마 논사들의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런 공적이 없었다면 후의 중관 학설이나 유가유식설 등의 대승불교 철학의 출현은 불가능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출가주의와 은둔적 금욕생활의 부파교단은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계승된 전승교단으로 제자의 불교, 배우는 입장의 불교이며 남에게 가르치는 입장의 가두불교는 아니다. 이러한 수동적인 불교였기 때문에 사회적 이익을 위해 땅을 뺏거나 경제권의 학보를 위해 패거리를 모으거나 투쟁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근본진리에 있어서는 목숨을 내놓을지라도 타협하거나 양보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신앙적 측면에서 대중과의 거리는 멀어지고 결과적으로 신앙 실천 불교의 쇠퇴를 가져와 대승불교를 탄생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