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천원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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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중도(中道)
등록일 2018/06/07 조회수 984
작성자 낙천원 주변에알리기 트위터 페이스북
 중도의 뜻도 얕고 깊은  것이 있다. '거문고의 줄이 탱탱하거나. 느슨하거나...'이  중간을 택하는 중도가 있고, 좋고 나쁨을 동시에 취하거나 버리거나 등의 방법으로 밖에 설명 할 수 없는 깨달음의 중도가 있다. 여기서는 붓다가 깨치신 정각(正覺)의 중도를 중심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인간과 신의 둘을 취하면 묘한 작용이 나온다.
  있음과 없음의 둘을 취하면 평등한 모습이 보인다.
  선과 악의 둘을 취하면 편안한 세계가 나타난다.
  미움과 고움의 둘을 취하면 자비의 모습이 보인다.
  너와 나의 둘을 취하면 새로움이 창조된다.
  고통과 즐거움의 둘을 취하면 자기의 모습이 보인다.」

   이와 같이 중도란 가운데를 취하는 것아니라 분별하는 둘을 합해서 하나로 할 적에 중도 사상이 나온다. 하늘의 파란색이나 바닷물의 파란색은 그 색갈이 파란게 아니라 지구촌이나 우주 촌에 있는 모든 빛깔이 합쳐서 파랗다. 파란 고려청자는 불교를  상징한다. 지구상의 모든 빛깔이 비쳐서 하나로 모아진 색깔, 파란색은 불교의 중도사상을 잘 표현한다.

  중도 사상은 불교의 공사상을 논리화 시킨 것이다. 대승불교의 공사상의 학문화 되면서 거기에 철학적 사색들이 덧붙여 졌다. 즉 모든 존재는 연기에 의지해 존재함으로 그 자체의 고유한 자성(自性)이 없어 공(空) 이라 한다. 그런데 이 공은 유 ㆍ무의 극단이 없으므로 중도이기도 하다. 이러한 중도사상에 제일 많이 영향을 미친 사람이 용수(AD150~250)이다.

  팔부중도(八不中道)와 삼제게(三諦偈)는 용수 중관론의 중도사상을 표방하는 대표적인 교리이다. 용수는 중관론(中觀論)에서 철저하게 중도를 주장하여, 공과 가(假)를 타파하고 다시 중도에 집착하는 견해도 파하며,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머물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가지도 않는다' 라는 팔부중도 곧 무소득의 중도를 말하였다. 이렇게 하여 모든 사견(邪見)을타파하고 , 모든 희론을 멸했다.
  용수보살이 중론을 지을 때 제일  첫머리에에 팔부중도를 갖다놓은 것은, 모든 중생들이  나고 사라짐의  편벽된 위치에 처해 있으므로 , 이것을  완전히 부수고 중도를 펴기 위함 이었다. 부처님의 수많은  법문도 중도 법문이 제일 많듯이, 용수보살도 평생을 중도를 고찰하며 불법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중론에서 중도사상을 공(空). 가(假).중(中)이 세 글자로 간명하게 정의했다. 모든 인연으로 생기는 법을 곧 무(無)라고 하고 또한 가명(假名)이라고 하며 중도라고 하는데, 아주 아무것도 없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분명히 연기 하면 묘유가 있으므로 가(假)인 것이다. 연기를 하라면서 공하고 공하면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은 공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며, 동시에 공이고 거짓이며 이것이 곧 중도이다. 용수가 말하는 중도는 어종정한 중간의 의미가아니라, 오히려 양자를 초월 하므로서 누리는 절대평등의 세계이다. 이것을 진속원융(眞俗圓隆)이라고 한다. 새속과 진리의 세계가 둥글게 화합하여 걸림이 없다는 뜻이다.
  삼제게(三諦偈)는 아래와 같다.
  ① 공제(空諦) 
       모든 존재 사물의 인연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며, 그 자신의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에 공(空)이다.
 ②  가제(가제)
      공(空)인 것은  확실히 진리이지만 우리는 '공'이라는 특수한 무었인가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공이라는 것은  편의상 이름 붙인것이다. 공을       실체시 해서는 안된다.
 ③  중제(中諦)
      그렇기 때문에 공은 다시 부정되지 않으며 안된다 즉 공은 또한 공이다. 공은 다시 공이라는 경지에서 중도가 나타난다.
 사람이 수행을 고도로 쌓아 번뇌와 무명을 일시에 깨트려 허공처럼 청정하고 확트인 참마음 자리가 열리면 여기에는 한 점의 의혹도 속박도 치우침도 없게된다. 이것을 중도의 경지라고 하며, 이 앞에서는 어리섞은 중생들이 틀어쥐고 앉아있는 나다 너다 옳다 그르다 높다 낮다 있다 없다 하는 등의 온갖 분별이 봄눈 녹듯 사라진다.
  석존이 깨달은 도라는 것도 '중도'이다. 깨쳐 근본에서 보니까 모든 괴로움은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는 것에 집착하고  허덕이며 괴로워하는 인간드의 모습만 보인다. 즐거움움도 마찬 가지이다. 기쁘고 노엽고 슬프고 즐거운 희노애락 전체가 실체가 없다. 고정된 실체가 없는 세계에 매매달려 집착하며 고집하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집착이 없이 공평하게 현실의 근본을 직시해서 일체가 공(空)으로 연기할 뿐임을 알아, 본질에서 바르게 보고 바르게 행하여야 한다.' 는 것이 중도이다. 편견이나 집착에서 벗어나 중도의 실천을 불교는 요구하고 있다.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있는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고 한다.' 

 모든 인간은 '나고 죽음'의 세계를 피할 수는  없다. '나고 죽음' 이 있음으로 열반이 있다.  따라서 '나고 죽음' 없으면 열반도 없다. 즉 생사와 열반이 원만하게 조화되어 상호공존(生死涅盤相共和)할 때 둘이 아닌 것(不二)이 되어 중도의 세계가 된다.
  그러나 중도의 세계를 언어체계나  논리형식으로 증명하고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중도의 세계는 깨달음의 세계이고, 이 깨달음의 세계에서만 중도는 완성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도는 치우침이 없고 또한 중간도 없는 것이다. 치우침이란 역시 우리들의 마음이  분별작용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마음의 분별작용에 의해서 파생한 치우침을 처리할 방법은 결국 중도를 깨치는 방법밖에 없다.

  우리들이 경험하는 세계는 언어에 의해서 규정되고 정리된다. 여기에서 희론이 발생하고 언어에 의한 편증이 온다. 그러므로 '희론'을 없이 하는 게 이상적이라고 했다. 언어를 초월 그 어느것에도 편중되지 않는 것을 중도라고 한다. 이것이  중도 사상의 핵심이다. 이 같은 용수의 생각은 후계자들에 의해 연구되고 분류되면서 대승불교의 대표적 학파인 중간파를 형성하여 후세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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