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밀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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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8/06/14 | 조회수 | 872 |
작성자 | 낙천원 | 주변에알리기 |
밀교의 한 분파인 금강승(金綱乘: 밀교에 해당하는 인도의 호칭)은 특히 힌두교의 탄트리즘을 받아들여 신비주의 와 결합시킨 후 지혜를 정적(靜的)으로 파악하여 여성에 비유하고, 방편을 동적(動的) 으로 파악하여 남성에 비유하였다. 그리고 지혜와 방편의 합일에 의해 체득되는 궁극의 경지를 열반으로 표현하며 이 열반의 희열을 남여 교합의 기쁨에 비유하였다. 이러한 이론을 수행과정에 도입하여 교단이 자체 분열 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성적행위와 일치하는 금강승의 요가를 진언승과 구별하여 좌도밀교라 하고 진언승을 우도 밀교라 하였다.
여기서 1,700년에 달하는 인도불교사를 통해 인도에서의 마지막 불교인 밀교의 성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인도의 불교역사는 먼저 부처님께서 살아계시면서 직접 제자들을 지도하셨던 45년과 사후30년간의 근본불교 시대와
② 그리고 부처님이 열반하신뒤지만 불교의 모습이 비교적 잘 지켜졌던 100년 동안의 원시불교시대,
③ 그 다음 약 600년간 많은 부파와 분파가 각자 독특한 교리체계를 세운뒤 정착했던 시기인 부파불교시대가 있다. 이 부파불교가 출가수행 자의 개인수행과 아비달마 연구에 빠져 대중과 멀어지자.
④ 의식있는 재가불자와 진보적인 스님들이 이를 소승이라 비판하면서 '근본불교'롱의 회기를 내세우며 보살이 주체가 되어 일반대중 함께 해야한다는 대승불교 운동을 강력하게 일으킨다. 이 대승불교 시대가 300여 동안 계속된다. 이때부터 불교의 자비정신이 최고로 고취되었고 대승불교가 성숙할 무렴에 밀교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⑤ 대승불교가 중관과 유식과 같은 고도의 관념체계를 가지고 현학적으로 흘러가면서 다시 대중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에 굽타왕조(320 ~ 500년경)가 등장하면서 바라문교를 국교로 정하였다. 굽타왕조에서도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불교였지만 바라문교의 영향을 피 할 수는 없었다. 바라문교에 유행했던 민간주술과 신비주의적 의식은 그대로 불교세계에 흡수된다. 이러한 밀교시대가 700년 동안 지속된다. 인도의 모든 토속신들이 불교의 세계로 흡수되어 불교의 불 보살 명왕 제석천 범천 팔부신중 등으로 다시 탄생하였다. 이러한 특징으로 7세기 중엽부터 대승불교는 급격히 밀교화 되었다. 7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많은 인도 밀교승들이 당의 장안으로 가 밀교를 전했다. 후기의 밀교는 8세기 이후의 티베트와 네팔에 전파되어 오늘날 라마교라는 이름을 갖게된다.
⑥ 1199년 파라왕조가 멸망하고 이어 1203년 이슬람교의 장군 이크티야르 웃딘 무하마드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갠지스 강변의 의 밀교 최종 근거지 비트라마시라 사(寺)를 점령함과 동시에 마지막 불교였던 밀교는 마침내 인도 역사에서 그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밀교는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그 과정을 보면 다음 보면 다음과 같다.
① 고구려에 처음 불교가 전해진 것은 소수림왕2년(372년)으로 진왕 부견이 스님 순도와 더불어 불상 및 경전을 보내온 데서 비롯한다.
② 백제에 불교가 전해 진것은 침류왕 원년(384년)에 고승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바다를 건너 백제에 와서 불교를 홍포 하였다.
③ 신라에는 법흥왕15년(528년)에 고구려로부터 온 묵호자에 의해서 불교가 전해졌다.
위 사실은 불교가 국가로 부터 정식으로 공인된 시점을 말하는데 사실 불교는 그 이전부터 민중들에게 전파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