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천원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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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밀교
등록일 2018/06/15 조회수 873
작성자 낙천원 주변에알리기 트위터 페이스북
 백제와 고구려에 불교가 아무 저항없이 받아 들여 졌다는 것은 재앙을  멀리하고 복을 빌며 현세적 이익을 추구 하는 밀교의 경전이 이미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마라난타나 묵호자와 같은 스님의 이름에서도 밀교의 체취가 난다. 마라난타는 천축국(인도)출신의 스님이고 묵호자는 '검은 오랑캐'라는 뜻인 이 역시 서역출신의 스님이 틀림없다. 당시 인도에서는 밀교가 일어날 때이므로 이들에 의해 전해진 불교는 밀교일 가능성이 높다. 
  안홍은 신라에 본격적인 밀교를 전파한 승려로써 611년(진평왕2년)당에 건너가 귀국하여 황룡사에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을 번역하였다. 명량은 [관정경]에 근거하여  신인비법으로 당나라 군대의 침공을 물리 쳤다고 하고, 혜통은 진언을 외워 신문왕의 등창을 낫게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특히 명량의 신인비법과 혜통의 진언지송은 고려시대 밀교 종파인 신이종과 총지종이 성립 할 수 있었던 기초가 된다. 이와 같이 신리시대의 밀교는 여타 불교의 신앙형태와 결합하였고  또한 무속신앙까지도 흡수하여 매우성행 하였다. 
   ④ 고려시대에 들어와 밀교적인 수행의식은 호국불교 형태를 띠면서 왕실의 적극적인후원을 받게 되었다. 특히 연등회와 팔관회는 고려의 왕실행사로 수용되면서 밀교적인 요소가 두드려진 불교의식으로 변모했다. 밀교신앙이 더욱 성행했던 후기에는 왕의 즉위식도 밀교적인 작법에 이거하여 거행하여 졌다. 고려대장경의 조판사업에서도 밀교계통의 경전들이 많이  포함되었는데 [대비로자나경][금강정경]등을 비롯한 191종 356권의 밀교경전과 밀교의식의 작법을 기록한 20종21권이 의궤가 들어있다. 1328년(충숙왕15)에는 왕실이 발원에 의해 밀교대장경 130권을 간행했다. 
   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왕실과 민간의 신앙으로 이미 널리 유표된 밀교는 계속유지 되었다. 1395년에는 총지종과 선인종의 본사 총지사와 현성사에서 대규모 불사를 개최 하기도 했다. 그 자신 불교탄압을  강행했던 태종도 태조가 즉위하자 진언법석 등의 각종법회를열엇고 세종은 1450년 [공작명왕경]에 근거한 공작재를 개설하는 등 이후에도 왕왕실이 주체한 밀교법회는 끊이지 않았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오히려 이전시대보다도 더 많은 밀교서적이 간행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진어과 다라니에 관한 것으로 대표적인  것에는<진언집><오대진언><천수경><비밀교>등이 있다. 선의 근본경전 중의 하나인 능엄경에 진언만으로 독립된 능엄주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생각 이상으로 밀교와 선이 늘리 융섭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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